[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실과 바늘로 그리는 화가 서옥순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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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19   |  발행일 2021-02-19 제38면   |  수정 2021-02-19
한 땀 한 땀 기억한 어머니의 삶과 눈물
색동 복주머니 만들어 주던 할머니
사랑으로 감싸 안았던 따뜻한 추억
긴장·이완의 순간 반복하는 '인생'
맺음과 풀림이 반복되는 '바느질'
자식들 밥 한그릇 더 챙기기 위해
성실과 신념으로 살아온 헌신의 삶
문득 흘러내린 실이 눈물로 완성
그 작품 앞에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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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순 자화상(2018)

가창댐을 안고 숲길을 삼십분 정도 달리면 고갯마루 아래에 할머니 댁이 있다. 부엌과 나란히 있는 작은 뒤뜰에는 우물이 있었다. 낮은 담장을 뒤로하고 가지런한 장독대가 있는 그 공간은 할머니의 많은 시간이 머물던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밭에서 따온 오이·고추·참외들로 우물가가 풍성했다. 가끔은 맑은 물이 담긴 그릇이 장독대 위에 올려져 있기도 했다. 낮에는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우물가는 밤이 되면 키 큰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처진 할머니의 기도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물 속을 내려다보는 것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일이었다. 까치발로 디뎌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우물 바닥은 아득한 깊이 때문에 현기증마저 일게 했다. 잠시 내려다보는 순간, 코 끝을 스치는 우물 속 공기는 푸릇한 이끼 내음과 함께 달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고 또 다른 비밀의 세계를 본 것 같았다.

우물가의 또 다른 풍경은 사람들이 밭일을 끝내고 돌아와 등목을 하는 즐거움이었다.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조금씩 흘려 내리면 모든 세포를 깨우는 듯 번쩍 정신이 드는 아찔함이 있었다. 매미 소리가 가득하고, 쨍한 한낮의 더위도 그렇게 잠시 가라앉았다.

코 끝 시린 겨울에는 창호문 저편에서 새벽부터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누워 비질 소리를 듣다가 대청마루에 서서 비질 된 마당을 바라보면 그 결들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실과 바늘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서옥순 작가의 작품들은 이렇게 옛 기억들을 소환해 주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작품을 시작한 계기가 '할머니가 색동천으로 복주머니를 만들어 주었던 기억'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6년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작품의 소재들은 고무신, 색동저고리, 기하학적인 선들로 교차되면서 이어지는 바느질이었다. 그것은 서양에서 동양이라는 근원에 대한 고민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선택된 물상들이다.

지금까지 그 물음은 계속되었고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유'다. 그 존재는 작가의 현존이면서 혹은 할머니 어머니의 삶을 아우른다.

그녀는 '바느질로 생각'하는 작가다. 바느질은 서두를 수 없다. 오직 성실과 신념으로만 가능한 행위다. 그래서 끊임없는 성찰의 온기를 품고 있다. 작품의 도구로 바늘을 선택하는 것이 서양화와 현대미술을 전공한 작가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안의 더 큰 자아를 발견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 지점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밀어 올리는 당당한 생의 에너지를 얻게 된다. 작가는 더 큰 자아를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 안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넓고 큰 캔버스에 붓 대신 작은 바늘을 들고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고 당당하다. 그렇게 한 땀씩 수놓아 만든 '자화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처음부터 눈물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수를 다 놓은 뒤에 가위를 찾으려고 하다가 문득 그 흘러내린 실들이 눈물 같아서 그냥 두었다고 한다. '그냥 눈물 같아서'라는 그 간명한 말뿐이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한 그 순간 그녀는 깊고 청량한 우물의 물 맛 같은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작품은 경험의 축적 속에서 외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가 스스로도 눈치 챌 수 없는 의식의 임계점, 즉 더 이상 언어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의 지점에서 탄생되기도 한다. 그 지점에서 만나는 작품은 작가에게도 최선의 몰입을 요구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의 아득한 바닥에 두레박을 내려야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에 묻어 있는 관조적 입장이 또한 그녀의 '사유'의 한 축이다. 치열한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에 함몰되지 않는 견고함과 정직함이 있다.

이처럼 '맺음'과 '풀림'을 반복하는 바느질은 언제나 긴장과 이완의 순간을 반복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자화상' 속의 눈물은 그녀 자신의 눈물이 아니라 수천 년을 이어 온 이 땅의 어머니들의 눈물이다. 그 눈물은 장독대에 떠 놓은 정화수이거나, 성수이거나, 감로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한다.

2018년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에서 '눈물' 시리즈가 연작으로 발표되었다. 작가는 세상의 많은 눈물을 껴안았다. 수많은 시간과 생명을 보듬어온 '성스러운 눈물'은 보석처럼 빛난다. 주목할 또 하나의 작품은 '그릇'이다. 그릇 안에는 실 혹은 물로 가득한데 흘러내린다. 이중적인 의미의 장치들이다. 고여 있던 눈물들이 쏟아지듯 많은 실들이 풀어져 내린다. 맺힘과 풀림의 바느질의 언어는 저토록 단호하고 간명하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밥을 다 먹고 나면 뒤돌아서서 부뚜막에서 밥 한술 뜨셨다. 지금 생각하니 문득 그 한술조차 자신을 위해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 자식들의 밥 한 그릇을 위해서, 저 어린 생명들을 이어나가기 위한 헌신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릇의 작품 앞에서 무수한 어머니와 할머니와 내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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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순 '헤르만 헤세의 나비'(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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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순 '눈물 연작' (2018)

그녀는 최근에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977~1962)의 소설 '나비' 이야기를 작품화했다. 대구예술발전소의 첫 기획전시인 '그레이트(Great) 인물'전(2월 9일~4월18일)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 설치작품은 입·눈·코가 명확하지 않은 미분화된 상태, 침묵하는 얼굴이다. 말 할 수 없거나 볼 수 없거나 오로지 세상을 향해 날 선 귀만 있을 뿐이다. 혹은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려고 하는 찰나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작품의 주제가 된 '나비'의 주인공은 나비 채집에 열광하지만 어떤 이유로 자신이 채집한 나비들을 바스러뜨리고 만다. 소설은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를 부수고 또 하나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 성장의 여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옛 자수 병풍에는 백 마리의 나비를 수놓은 것이 있다. 백접도(百蝶圖)라고 하는 병풍이다. 여인들은 나비를 가구와 그림과 자수 등에 표현했다. 자유로움으로 상징되는 나비는 한편으로는 장수를 뜻하기도 한다. 여든 살을 뜻하는 질()이 나비 접(蝶)자와 동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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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서옥순 작가의 설치작품인 헤르만 헤세의 '나비'를 바라보는 순간 백 마리의 나비를 수놓은 병풍이 펼쳐졌다. 일순간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병풍 속에 갇혀 있었던 그 나비들은 바늘땀 같은 작은 흔적만 남긴 채 병풍 밖의 세상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바느질로 수많은 어머니의 슬픔을 껴안고 나아간다. 그래서 거인처럼 담대하며, 바늘처럼 섬세하고 색동천처럼 따뜻한 시선의 작가다. 그녀는 어머니들의 눈물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비'는 이제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기쁨의 찰나를 보여준다. 작가의 바느질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직한 한 땀의 바느질로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행복한 삶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고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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